[코로나시대_청년생존보고서⑨] 나에게 집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2020-05-25T08:19:14+00:002020. 05. 22.|

코로나 블루 : 외면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주할 때

김소영(bonnygirlksy@naver.com)


 

그림1

 

올해 2월 퇴사를 했다. 살면서 처음 해보는 퇴사였다. 3년을 악착같이 버티던 회사 생활로 인해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나는 거창한 ‘퇴사 라이프’를 꿈꿨다. 제일 먼저 여행을 가야지. 퇴직금이라고 들어온 돈은 고작 몇 개월의 생활비밖에 되지 않으니, 내 수준에 적당한 나라가 어디 있을까. 러시아, 몽골, 베트남 같은 나라의 비행기 티켓을 밤낮없이 검색하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퇴사 후에 하는 여행은 얼마나 홀가분할까. 9일 남짓 되는 휴가 기간 꽉꽉 채워 여행하고 돌아와, 바로 다음 날 숨도 못 돌리고 출근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아마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마저도 여행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꿈꿨던 일상은 이게 아닌데

 

그렇게 일주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오면 서울 곳곳에 숨어 있는 감성 카페를 찾아다닐 계획이었다. 직장인 신분일 땐 꿈도 못 꾸던 평일 한낮에 핫한 카페 가기. 사람들 없는 카페에 앉아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멍도 때리면서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릴 심산이었다. 그밖에 평일 낮에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 아침도 저녁도 아닌 2~3시에 하는 운동,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일, 매일 장을 보고 여유롭게 밥을 만들어 먹는 나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회사에 시간을 바치느라 포기했던 소소한 일상을 되찾아올 계획이었다.

 

그림2

 

하지만 코로나가 그 모든 것을 발목 잡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지 않았던 시기엔 내 계획은 조금도 흔들릴 여지가 없었다. 같이 여행을 가기로 했던 지인은 조심스럽게 여행 못 가는 거 아니냐고 운을 뗐지만, 나는 너무 간절했던 여행인지라 왜 못가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마스크 잘 끼고 가면 된다고 상황을 간단하게 일축해놓긴 했어도 불안하긴 나도 매한가지였다. 이러다가 정말 못 가는 거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확진자 수가 천 단위로 뛰고, 이 시국에 여행을 가는 것을 우려하는 국민들의 목소리, 여러 각국에서 동양인을 혐오하는 사건까지 상황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결국 여행은 지인과 상의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취소됐다.

기분이 울적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지지리 운도 없지. 하필 내가 퇴사할 때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마련한 시간인데. 얼마나 기다려온 시간인데. 그 괴로웠던 회사 생활을 잘 버텨왔다고 보상 좀 해주겠다는데 왜 나는 그런 것마저 어려운 건데. 수신자가 없는 불만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그렇게 나의 계획은 여행을 시작으로 많은 것들이 어그러졌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고서부터 문을 닫은 도서관, 확진자가 다녀간 뒤로 폐쇄된 영화관,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명상 같은 여러 커뮤니티 모임이 연달아 취소되고, 마스크를 한순간도 벗지 못하는 카페, 헬스장, 마트 같은 실내풍경은 생생한 에너지를 잃어갔다. 많은 것들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사람들은 집으로 들어가 잠시 멈춰달라고 말했다.

 

조카 돌봄부터 감정 노동까지
밖으로 도망치고 싶은 나날

 

설상가상으로 초, 중, 고등학교의 개학이 연기되면서 조카 셋의 돌봄 노동이 시작됐다. 초등학생인 첫째와 둘째, 아직 유치원생인 막내까지. 퇴사해서 집에 있다는 것은 쉽게 ‘시간이 남아돈다’로 해석됐고, 가족들은 내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마치 집으로 재취직된 것 같았다. 조카들 공부 봐주고, 놀아주고, 먹이고, 자기들끼리 놀다가 싸우면 수습하고. 그뿐 아니라 우울증을 앓는 아빠가 공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케어하고, 하소연할 곳 없어 쌓인 게 많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감정노동까지. 집 안은 매 순간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이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에 나는 지인들 사이에서 집순이가 아니기로 유명했는데, 사실 그 뜻은 그저 단순히 활동적인 사람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비슷한 이유로 내게 집은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쉴 수 있는 곳은 언제나 가족 밖에 있었다.

광고에서 보여주는 ‘가족’의 이미지처럼 훈훈하고 아름답기만 한 가정이 몇이나 될까.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데 아프기까지 한 아빠와 그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엄마, 아직은 어리고 정신없는 조카들. 그들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코로나 시국에 ‘집’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내 몸을 편히 뉘일 곳이 없다는 감각, 한순간도 쉬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고단함, 외부와의 단절감은 단순히 ‘퇴사했는데 여행도 못 가’ 수준의 불만을 넘어서 나를 병들게 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기도가 조이기 시작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코로나가 아닐까. 두려움이 엄습했다. 두려워하면 할수록, 확진자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볼수록, 집에 머물러야 하는 날이 늘어날수록 가슴이 옥죄이는 느낌은 더 심해졌다. 공황발작이었다.

 

그림3

 

극심한 우울 주기가 몇 주를 걸쳐서 이어졌다. 밤에 잠을 잘 수 없어서 괴로운 날이 늘어가고, 불규칙적으로 밥을 먹고, 움직임이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생활패턴도 엉망이 됐다.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인터넷 세상에는 달고나 커피 400번 휘저어 먹기, 오일 파스텔로 그림 그리기, 화상 앱 모임처럼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붐처럼 유행하는데. 나는 그 어떤 것도 이 우울에서 나를 구제할 수 없다고 느꼈다. 한 것도 없는데 일 그만둔 지도 어느새 4개월을 향해 흐르고, 퇴직금은 자꾸만 실속 없이 어딘가로 흘러 없어졌다. 퇴사 후 나의 생활은 우울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에…

 

코로나가 뒤흔들어 놓은 마음 속 풍경 마주하기

 

코로나 때문에? 어딘가 이 문장에서 숨이 턱 걸린다. 뭔가 그렇게 탓만 하고 끝나기엔 간단하지 않은 느낌. 사실은 잠시 멈춰 있던 지난 4개월이 내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덮어뒀던 모든 문제를 잔인하게 탈탈 털어 내 눈앞에 종합적으로 보여줬다고 말하는 게 더 맞겠다. 마치 ‘네가 어떻게 가족 안에서 부유했었는지 봐봐, 그동안 네 몸을 혹사하며 얼마나 바쁘게 지냈는지도 보고,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거 이번이 처음 아니잖아. 얼마나 아픈 건지도 좀 알아봐 주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다시 빼앗긴 자유는 어쩌면 정말로 나를 물리적으로 멈추게 해줬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억지로 하지 않으면 진짜 안 멈췄을 테니까. 가고 싶은 곳, 배우고 싶은 것, 새로운 프로젝트, 모임으로 빼곡히 채워진 지난 3년간의 캘린더를 보면 아찔하다. 쉴 줄 모르는 사람. 분명 퇴사하고 시간이 남아돌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라는 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게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때, 마음이 힘들고 철저하게 외로울 때 그 모든 걸 잊기 위해 더 집착적으로 바쁘게 지냈다는 것도.

생활 속 거리 두기가 시행되면서 도서관 문이 개방됐다. 오랜만에 만난 서가에 꽂힌 낡은 책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세 권의 책을 대출하고 나오는 길엔 슬그머니 기분이 좋았다. 마음이나 집이나 내 상황은 여전하고, 퇴사하고 못 누린 억울함도 백 프로 해소되진 않았다. 그래도 내가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대충 눈치 채게 된 건 사실이다. 뻔해도 어쩔 수 없다. 내 상황과 마음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마주하는 경험은 이렇게 작정하고 시간을 내지 않는 이상 쉽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느려진 세상의 속도와 발맞춰 코로나 상황도 내 마음도 회복되고 나면, 그 이후의 일상을 다시 꾸려나갈 힘도 생기겠지. 그때까지는 그 모든 것을 서두르지 않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