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른 2020년 결산] 안녕 이제 그만

2020-11-26T11:20:26+00:002020. 11. 26.|

“정리는 인생의 새 출발이다. 정리를 결심한 그때가 과거를 매듭짓고 미래로 첫걸음을 내딛는 최고의 타이밍이다.”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

 

글, 사진 / 정은주(silverj66@naver.com)

 

서점 한 켠에 자리잡은 ‘정리’

서점 한 켠에 자리 잡은 ‘정리’

 

[그땐 좋았지]

2월 초에 다녀온 게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포르투갈의 포르투, 리스본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겨울에도 비교적 따뜻한 도시들이어서 서울의 강추위를 겪지 않으며 가벼운 옷차림으로 열심히 다녔다. 한국에서 KLM 비행기를 타고 암스테르담에서 환승해야 했는데 그곳에서도 3, 4일가량 머물렀다. E사에서 출판한 네덜란드 여행 책자는 1, 2월을 여행하기에 추천하지 않는 시기라고 했다. 할 게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여행이 주는 행복감 때문인지 내게 암스테르담은 볼거리 많고 또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다. 유럽에서 머무는 동안, 한국의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졌다.  마스크도 구하기 힘들다고 해 유럽에서 구매했다. 지금 있는 곳이 더 안전한데 돌아가기 싫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여행=돈 아니던가. 예정대로 귀국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유럽의 코로나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뉴스가 떴다.

 

[터닝포인트]

코로나의 여파로 1년도 지나지 않은 여행이 이젠 전생 같다. 3월부터 돈벌이를 위한 준비를 하겠다 마음먹었는데 전 세계에 닥쳐온 질병은 사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2020년에는 기계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역병으로 죽다니. 세상은 지나치게 빠른 발전을 해왔고 또 그것을 추구하는데, 이런 면에서는 일반인에게 투표권이 없던 시대와 다를 게 없다. 강제로 집에 갇히다시피 한 상황에서, 집순이 생활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에 관하여 고민했다. 경제활동인구는 될 수 없고 집에서 무엇을 해야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이 시국에 나는 ‘정리’하며 살기로 했다.

그동안 생각하지 않던 주제는 아니었다. 미니멀리즘이 트렌드로 도래한 후 서점가에 자리 잡은 ‘버리기’ 코너를 볼 때도 생각했다. 올 6월부터 방송한 TV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를 발견하고는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구나, 라고도 생각했다. 정리에 관한 수요가 있기에 방송이 만들어졌을 테니까. 실제로 내 소유의 집이 없는 나는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 준비를 할 때마다 버리기를 했다. 하지만 올해는 더욱더 여러모로 정리가 필요한 해이기도 했다. 우선 이제까지 일해왔던 직군을 아예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최저시급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은 괜찮았다. 안정적인 위치로 올라갈 수 있는 길도 매우 좁았지만, 처음부터 감수한 바였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참았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유지하는 기둥 중 하나가 와르르 무너지니 연쇄적으로 모든 것을 참지 못하게 했다. 몸이 많이 아파왔다.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버티기를 포기했다. 좋은 기회가 생기면 그 일을 다시 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먹어버린 나이, 좁디좁은 업계 등 여러 이유로 돌아갈 수도 없고 지금은 돌아갈 생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일단은 미련을 떨쳐내고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내년엔 5년이나 살던 집을 떠나 이사할 예정이다. 원래 내 자아는 과거를 복기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참 더디다. 내가 그레텔이었다면 집을 찾아오기 위해 길에 뿌렸던 빵 조각들을 동물들이 먹어 치워 사라졌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챘을 거다, 계속 뒤돌아봤을 테니. 성격 자체가 과거를 돌아보며 사는 사람이라 스쳐 지나는 인연을 쉬이 보내지 못하고 오랜 물건들 또한 쉽사리 버리지 못한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달리기를 멈추고 과거를 돌아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는 이번을 기회 삼아 미래로 한 발짝 내딛는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과거의 산물로, 이제까지 사들인 물건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버리고 버리기]

학교에 다니며 꽤 오랜 시간 혼자 살았는데 최근 5년은 동생과 같이 살았고 부모님도 주기적으로 서울을 방문하셔서 세간살이가 섞였다. 가족 간에 합의가 필요 없는, 내 방에 있는 짐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한 번에 무리하면 금세 지쳐 떨어질 터였다. 오늘은 책장 맨 아래 칸, 내일은 위쪽 두 칸, 다음 주는 옷장을 뒤져보기 등 이런 식으로 소소하면서 길게 계획을 잡았다.

약 10년간 모은 잡지부터 손을 댔다. 매거진은 손댄 적이 아주 드물었다. 버리려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내겐 아주 의미가 크니까. 즐거움을 주었고 꿈꾸었고 몇 권은 내 노력이 들어가 있는 월간 책. 책은 반복해서 읽는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잡지는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과월호를 다시 읽곤 했다. 소스를 얻기 위해 지난 잡지들을 들춰보기도 하니 실용성도 있었다. 그러나 매거진은 일련의 사건으로 내게 아픔이 되었고, 그래서인지 구매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게다가 집에 잡지가 쌓여갈수록 한 잡지를 계속해서 찾아보는 일은 줄어들었다. 레퍼런스도 종이 잡지보다 모바일에서 서치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그래서 큰 결심을 했다. 한 권씩 들춰보며 골라 우선 15권 정도를 버렸다. 버릴까 말까 고민한 친구들은 처음에 버리지 않았다. 대신 두 달에 한 번꼴로 다시 들춰보며 버려냈다. 더 버릴 예정이다, 엑기스만 남길 생각으로.

화장품 또한 거국적으로 접근해야 할 그룹이었다. 뷰티 분야와 관련된 일을 했었기에 받은 화장품이 많았다. 그러나 피부가 민감해 이것저것 마음 놓고 사용하긴 어려웠고 쓰던 제품 혹은 맞는 제품을 계속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래 관심사이기도 했고 일과도 연관되다 보니 신상이나 처음 보는 브랜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여행을 갈 때면 면세점과 현지에서 화장품을 사들이곤 했다. 주변 지인들에게도 많이 나눠줬지만, 화장품이 꽤 남았고 특히 샘플이 무척 많았다. 고가 브랜드여도 오래된 샘플과 아직 용량이 좀 남았지만 피부 타입에 맞지 않는 제품은 버렸다. 뜯지도 않았는데 유통기한을 넘긴 것들도 처분했다. 처음으로 현재 쓰고 있는 색조까지 유통기한이 오래 지난 것은 눈물을 머금고 과감히 버렸다. 유통기한이 지난 색조 제품을 버리는 건 드문 일이라는 점을 꽤 다수의 여성은 공감할 테다. 하지만 올해 처음으로 입술이 화끈거리고 부어 립밤마저 바르기 어려운 경험을 겪고 눈가에 염증이 더욱 자주 생기면서 내린 선택이었다.

옷은 이전에 정리할 때보다 더 과감하게 분류했다. 작년에 입지 않았다면 버려야 한다고 들었는데 아직 내겐 고난도라 재작년부터 입지 않은 옷부터 처분했다. 어려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누렇게 된 블라우스부터 유행이 지난 청바지까지 헌 옷 수거함으로 보냈다. 여행을 다니며 모아둔 기차표, 전시회 티켓 등도 버렸다. 사진만 봐도 충분히 추억이 되고 정리를 하기 전엔 새까맣게 잊고 있던 것들이다. 기억을 돕는 최소한의 잡동사니만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에펠탑 아래에서 헐값에 산 금색 칠이 다 벗겨진 에펠탑 열쇠고리도 버렸다. 사진으로 예쁘게 담아뒀고 잊을 수 없는 명소니까 남기지 않아도 되겠지.

 

[정리하는 삶]

2020년에 대부분, 어쩌면 모든 글의 서문에는 ‘코로나 시대에’ 가 빠지지 않았다. 한때는 여기저기서 언제까지 코로나 시대에 대처하는 법을 모든 주제에서 다뤄야 하냐고 그만할 때가 됐다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연말이 도래한 지금, 여전히 우리는 하루 확진자 00명에서 000명이 오가는 매일을 살고 있다. 300명 돌파에 2.5단계가 시행되며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음울해졌다가 이후 143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에는 무감각해지는 오늘을 또 살고 있다. 영국에서 일하는 친구는 하루 확진자 만 명을 돌파하는 나라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코로나 시대에 사는 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이 발행되는 지금 이 순간,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가 500명을 돌파했다.)

하면 할수록 정리는 쉽지 않았다. 제대로 하자고 마음먹으니 더 어려웠다. 하긴 정리와 관련된 컨설팅 회사가 왜 등장했겠는가.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덕분에’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어쨌든 한번은 큰 정리를 했다. 물건을 버리면서 내 주변도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매번 마음 정리도 다짐하기 때문이다. 모든 걸 끌고 가려다 보니 무거워서 자꾸 뒤돌아보고 앞을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는데, 마음을 자주 가다듬으니 이제까지의 인생도 조금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이제 주기적으로 ‘버리기’를 시행한다. 버릴까 말까 망설일 때 결국 버리지 않은 아이들을 버리기 위해서다. 4월에만 해도 의지에 가득 차 많이 버렸는데 또 점점 소심해진다. 이제 연말이니 다시 마음 다잡고 비우려 한다, 그게 무엇이든. 소중한 몇 개만 남겨두고 훌훌 털어버리는 연습을 오늘도 하는 중. 삶이 버겁다면 방 정리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p.s. 클라우드는 아직 손대지 못했다.